영화 ‘밀정’은 시대극의 정수를 보여주며, 최근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이정재와 송강호가 연기한 인물들은 친일과 독립 사이의 경계에 선 복잡한 인간상을 보여주며 관객의 깊은 생각을 유도한다. 특히 친일 논쟁과 과거사 청산의 화두를 던지는 이 영화는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남긴다.
친일과 독립, 그 사이의 정체성 – 이정출이라는 인물
‘밀정’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이정출은 일본 경찰로 근무하지만 조선인이다. 겉보기엔 명백히 친일 행위자다. 그러나 독립운동 조직을 감시하고 조종해야 하는 그의 임무는 점차 내면의 갈등으로 번진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독립운동가들의 신념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두 진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관객은 이정출을 통해 “나는 일제강점기에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밀정은 단순한 ‘스파이’가 아닌, 두 개의 뇌로 살아야 하는 존재다. 실제 인간의 뇌는 멀티플레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정출은 외부적 상황과 내부적 감정을 동시에 조절해야 한다. 모두를 속이고, 모두에게 속는 인물, 그는 고도의 정신력과 처세술을 지닌 인물이다. 감정 표현은 절제되어 있지만, 눈빛과 숨소리 하나하나에 인물의 내면이 느껴진다. 이정출은 결국 스스로 어떤 길을 선택했는가, 아니 선택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은 영화를 본 후에도 계속 관객의 머릿속을 맴돈다.
시대극의 미학, 고증의 정밀함 – 연출, 의상, 분장의 완성도
‘밀정’은 시대극으로서도 탁월하다. 1920년대 경성 거리와 건물, 차량, 간판, 사람들의 말투까지 모든 요소가 고증과 리서치를 통해 재현되었다. 특히 의상과 분장은 인물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정출의 날렵한 일본 경찰 제복, 이정재가 맡은 독립운동가의 깔끔한 수트와 안경, 양장점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인물들의 차분한 복장까지 모두 영화의 긴장감을 더한다. 의열단의 폭탄 제조 장면이나, 숨겨진 공간에서의 회의 장면 등은 조명이 어두우면서도 색감은 절제되어 있다. 이는 ‘숨겨진 전쟁’이라는 테마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밀정’은 영화적 연출의 디테일이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강하게 전달하도록 설계되었다. 감정적인 대사보다 공간과 복식, 음향으로 말하는 시대극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재판장 장면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 – 친일의 변신, 현실과 맞닿다
영화의 마지막, 이정재가 연기한 독립운동가 ‘김우진’이 법정에서 ‘애국자’로 둔갑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강한 불쾌함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닌, 현실에 존재했던 역사를 반영한 것이기에 더 불편하다. 실제로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친일 인사들이 처벌받지 않고, 때로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요직에 오르며 부를 축적했다. 반면 진짜 독립운동가들은 오히려 가난과 외면 속에 살아갔다. 이 장면을 보고 어떤 관객은 속으로 “이 인물이 총을 맞고 죽는 결말이었다면 얼마나 통쾌했을까”라고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그 상상이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건드린다. 현실에서는 그런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기에, 그 상상조차 통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밀정’은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함과 동시에, 우리가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정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단순한 영화 그 이상, 우리 사회의 기억법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밀정’은 1920년대 조선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과 시대의 부조리를 동시에 꿰뚫는다. 친일과 독립이라는 흑백의 프레임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무너지는 인간의 서사를 담아낸 이 영화는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한다.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사회는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받는다. ‘밀정’은 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며,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